(11) 말기 간암이 피를 몇 바가지 쏟고 5일 만에 나아
1981년 6월 온양온천 부근에 산다는 간암환자가 암을 잘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제천까지 나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간염으로 병원에서 주는 약을 계속 먹다가 더 심해져서 간경화가 되고 복수가 심하게 차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았더니 간암이 되었다고 한다.
환자는 배에 물이 가득 차서 북처럼 되어 있고 핏줄이 퍼렇게 거미줄처럼 덮여 있으며 뱃가죽이 얇아 마치 투명한 것처럼 보였다. 환자는 '제 병을 고쳐 달라고 부탁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음식이나 조금 먹게 해 주십시오'한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듯 했다.
환자의 증상은 명치 밑이 꽉 막혀 있고 설사를 하루에 두 세 번씩 한다. 또 배에서 돌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것이 심하비갱(心下??), 복중뇌명(腹中雷鳴) 하리(下痢)인 것이다. 이 3가지 증상이 나타나면 병명과 상관없이 감초사심탕(甘草瀉心湯)을 쓰는 것이 옳다.
감초사심탕을 본방대로 약을 주어 보내고 나서 뒤 몇 시간 뒤에 환자의 부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 약을 먹고 나서 반 요강 정도 피를 쏟고 쓰러졌는데 아무리 흔들어봐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죽었다면서 빨리 오라는 것이다. 나는 태연하게 '아주머니, 당황하지 말고 요강 속을 자세히 보세요.'라고 했더니 '피 쏟은 걸 봐서 뭣해요?' 한다. '글쎄 빨리 한번 자세히 보시라니까요.' 했더니 '안 볼래요. 남편이 죽었으니 빨리 와요.' 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 다음 전화를 기다렸다. 몇 시간 뒤에 전화가 다시 왔다.
"선생님, 그이가 하혈을 또 했는데 엄청나게 많이 나왔어요. 새까만 것이 중국집 짜장 같은 것이 나왔어요. 큰일났어요. 빨리 와보세요."
"그 검은 피가 계속 나와야 댁의 남편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약을 드리세요."
이 부인은 사흘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편이 하혈을 계속하니 큰일났다고 전화를 했다. 4일째는 새까만 피가 입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나는 그 약을 계속 먹이라고 했다. 5일째가 되어서야 출혈이 멈추고 배도 푹 꺼졌다고 연락이 왔다.
한 달 뒤에 환자의 장인과 장모가 선물을 갖고 찾아와서 사위가 병이 완전히 낫고 건강해졌다고 인사를 했다. 감초사심탕의 효력으로 간암이 5일만에 전멸하고 복수와 죽은피까지 몰아내어 죽어 가는 목숨을 살린 것이다.
(12) 간경화를 고친 거짓말 같은 사실
1968년 50살 된 남자가 간경화증에 걸렸다면서 그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 원주 도립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진단을 받고 원주기독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니 역시 간경화증이라고 한다고 했다. 환자의 부인이 하는 말이 '여러 한의원과 한약방을 다 가서 물어 보았더니 가는 데마다 '고칠 수 없는 병이니 아예 단념하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이라도 고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절대로 거짓말일 터이니 속지 마십시오.'라고 했다면서 내가 간경화증을 고친 일이 있다고 해도 전혀 믿지를 않는다. 나는 부인한테 '설사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고통이라도 덜어 드릴 수는 있을 것이니 환자한테 한 번 가 봅시다'라고 말했다.
환자는 보통체격으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몸이 피곤하여 날마다 그늘에서 쉬고만 있다고 했다. 맥은 폭이 좁고 약간 깐깐하다. 양쪽 갈비뼈 근처에 흉협고만이 강하게 나타나고 배꼽위에 강한 동계(動悸)가 있다. 잠을 잘 자지 못하고 밥맛이 없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며 변비가 심하며 구토가 난다고 한다. 이런 증상에는 시호가용골모려탕(柴胡加龍骨牡蠣湯)을 쓰는 것이 옳다.
시호가용골모려탕에 대황(大黃)을 4그램 넣어 8첩을 주었다. 환자는 이 약을 먹고 피로감도 없어지고 불면증도 사라졌으며 변비도 없어지고 밥맛도 좋아졌다.
그 무렵에 환자 집에 결혼식이 있어서 일가친척이 모였다. 친척 중에 하나가 말하기를 한약이 간경화에 효과가 있을 리가 없다. 그 병을 고친 역사도 없고 고쳤다는 얘기도 듣지 못했으니 틀림없이 그 약에는 진통제를 넣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환자는 그 뒤로 오지 않았다.
그 뒤 3년이 지나고 나서 우연히 그 환자를 만났다. 그는 선생님이 준 약을 먹어서 그런지 술을 끊어서 그런지 지금까지 별 탈없이 지내고 있다고 했다.
(13) 간경화를 고치고 큰절을 받아
1979년 봄이었다. 환자는 간경화증이고 중학교에 다니는 내 딸의 담임선생님의 장인이었다. 환자의 딸이 간경화증을 고칠 수 있는 선생님이 계시니 아버지를 모시고 가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네 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 최고가는 병원에서도 못 고친다는 판정이 났다. 그런데 산골짜기에 사는 엉터리의사가 고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약을 공짜로 준다고 하는데 그 약도 틀림없이 엉터리일 것이니 그만두라며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고 한다. 딸은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한테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환자는 60살쯤 되어 보였으며 살결이 거무스름하고 바싹 말랐으며 키가 크고 허리가 가늘며 몸이 앞으로 굽어 있다. 이런 형은 전형적인 팔미지황탕(八味地黃蕩) 체질이다.
환자는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먹어도 전혀 내려가지 않으며 대변도 꽉 막혀서 관장을 해야 간신히 볼 수 있으며 소변도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입이 심하게 말라도 물은 먹지 않으며 하반신이 마르고 고조(枯燥)하여 하얀 가루가 묻은 것 같다. 하반신이 마르고 하얗고 까칠까칠하다. 환자는 우선 음식이나 좀 먹을 수 있고 소화나 되게 해 주시오 한다.
복진을 해 보니 배 한가운데에 세로로 볼펜 굵기 만한 딱딱한 덩어리가 배꼽 아래로 길게 뻗어 있다. 소화가 안 되고 대소변이 다 잘 통하지 않으니 팔미지황탕에 우슬(牛膝), 차전자(車前子)를 각각 6그램씩 더하여 5일분을 주었다.
5일 뒤에 환자는 다시 와서 '그 약이 몸에 맞는 것 같습니다. 소화가 잘 되고 대변이 잘 나옵니다.' 한다. 다시 10일분을 주었다. 그러자 거의 모든 증상이 사라졌고 몸이 좋아졌다. 그 후 환자는 나한테 오지 않고 서울에 있는 일류한의원에 가서 20일간 약을 지어 먹었는데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또 다른 간경화를 전문으로 고친다는 한의원에 가서 약을 썼다. 그래도 점점 대변이 나오지 않고 병이 더 깊어졌다. 환자의 부인이 남편을 데리고 일류한의원, 전문가라는 사람, 박사들만 찾아다녔던 것이다.
약 50일쯤 뒤에 이 부인이 강원도에 있는 나한테 먼길을 걸어서 찾아왔다. 뚱뚱한 중년부인으로 한복을 잘 차려 입고 있었는데, 대뜸 나한테 큰절을 하면서 '선생님을 몰라보고 믿지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환자는 약을 2개월 동안 더 복용하고 완쾌되었다. 5년 뒤에 소식을 들으니 시골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 나라 한의학에는 복진법이 없다. 아무리 한의학 박사라도 복진법을 모르면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없지 않겠는가.
(14) 자궁암이 5일만에 나아
1977년 40대의 부인이 찾아왔다. 병명은 자궁암이라고 했다. 아랫배가 아파서 걸음을 걸을 수 없다고 한다. 두 손으로 아랫배를 누르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며 간신히 걷는다. 병원에서 수술을 권했으나 돈이 없어 수술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몸이 몹시 쇠약해 보였다.
복진을 해 보니 눌러서 아픈 데도 없고 배가 물렁물렁하다. 또 배를 이리저리 밀면 상하좌우로 당긴다. 이런 증상에는 당귀작약산(當歸芍藥散)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 또 당귀작약산은 몸이 잘 붓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랫배가 결리고 아픈 데는 반총산이요, 아랫배를 누르면 이리저리 당기고 아픈 것은 당귀작약산을 써야 한다.
그래서 당귀작약산과 반총산을 합방하여 5일분을 주었다. 5일이 지나자 통증이 훨씬 줄어들었다고 했으며 10일 뒤에는 완전히 나았다. 추위를 심하게 탈수록 또 아픈 증세가 심할수록 회복도 더 빠른 것 같다.
(15) 인공항문을 단 대장암 환자를 살려내다
1980년 4월, 50세쯤 된 부인을 남편이 등에 업고 왔다. 내려놓으니 부인은 축 늘어졌다. 멀리 포항에서 왔다고 하니 여독도 심했을 것이다. 이 환자는 처음에 왼쪽 아랫배가 아파 부산 백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았더니 대장암이라고 하여 수술로 대장을 상당한 길이로 잘라냈다. 그리고 그 부분에 주먹 두 개만한 비닐주머니를 달아서 대변이 이 주머니로 나오게 하고 직장을 떼어버리고 항문을 꿰매어 버렸다.
수술을 하고 나서 집에 오니 이번에는 배꼽 밑의 아랫배가 몹시 아팠다. 다시 백병원에 갔더니 자궁암이라면서 너무 늦어서 수술도 할 수 없으니 집에 가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죽기는 너무 억울하여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체격은 약간 뚱뚱하지만 물렁살이며 몸이 잘 붓고 냉증이다. 수술을 한 왼쪽 아랫배와 항문부위도 몹시 아프다고 한다. 소변은 항상 시원하게 나오지 않고 대변은 자동적으로 나오니 비닐주머니가 무거우면 털어 버리면 된다. 사람을 개조하여 망가뜨려 놓은 데다가 이제 목숨이 위급한 지경이니 치료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약이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했더니 환자와 남편이 약을 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애원한다.
수술한 뒤에 유착이 생겨 통증이 온 데는 신효탕(神效蕩)이요, 부종, 냉증, 하복통, 소변불리에는 당귀작약산을 써야 한다. 이 두 가지 약을 각각 10첩씩 주며 하루는 이 약을 먹고 다른 하루는 저 약을 먹는 식으로 복용하라고 했다. 이와 겸하여 유기자연농법연구소에서 공급하는 효소식품을 주었다.
나중에 부인은 약을 다 먹고 나서 매우 의기양양하게 걸어서 왔다. 약을 복용하니 아픈 것이 없어지고 소변이 잘 나오더라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 처방을 10일분씩 주어 보냈는데 그 뒤로는 다시 오지 않았다. 아마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3개월쯤 지난 7월에 그 남편이 와서 말하기를 소문(小門 : 성기)으로 좀 굵고 길며 매우 질기고 끈적끈적한 덩어리가 나왔는데 그 뒤부터 건강해져서 모내기철에 힘든 뒷바라지를 혼자 다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두 가지 처방 각각 4일분에 효소식품을 같이 주었다. 그 약을 다 먹고 와서 연락이 오기를 이제는 그 약이 먹기가 싫다고 했다. 그래서 보중익기탕에 당귀작약산을 합하여 주었다.
그 뒤로 연락이 없다가 4년이 지나서 한 번 연락이 왔는데 그렇게 인공 변주머니를 옆구리에 차고서도 건강하게 지낸다고 했다.
이 처방을 한 번 더 쓴 적이 있다. 1984년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50대 부인이 왼쪽 아랫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대장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대장을 잘라내고 항문을 막아 버리고 비닐주머니를 달았다. 며칠 후 아랫배가 심하게 아파서 다시 그 병원에 갔더니 자궁암이라서 수술을 할 수 없다면서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이나 먹다가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역시 신효탕과 당귀작약산을 겸복하고 효소를 겸하여 치료를 했다. 약을 먹으니 배아픈 것이 없어졌다. 그 뒤로 전화연락이 없어서 죽었느니 살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 뒤로 내가 급한 일로 멀리 떠나 있을 때 3번 전화가 왔다고 한다. 지금 이 환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연락할 방법이 없다. 이처럼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환자가 건강을 되찾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다시 한방의술의 신기한 효력에 감사를 드린다.
(16) 한약 백 첩을 먹어도 못 고친 자궁암을 고치다
1963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무렵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현대의학이 지금 같지 않아서 암검사도 서울에 와야만 할 수 있었다. 환자는 자궁암에 걸린 40살 된 부인으로 전기로 환부를 지져서 치료를 했다. 부인은 그 후유증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이 심하게 나고 온 몸에서 물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땀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환자는 체격이 건장하고 얼굴전체가 붉다. 혀는 앞은 백태가 끼고 뒤는 황태가 끼었다. 환자를 가까이 하니 입에서 악취를 풍긴다. 맥은 빠르게 뛰고 발작적으로 심한 복통이 오고 구토가 난다. 대변은 니상변(泥狀便 :진흙을 묽게 이겨 놓은 것 같은 상태의 변) 으로 항상 잘 나오지 않는다. 이 부인은 서울에서 제일 이름난 한방병원, 한의원 등에서 한약을 백 첩이 넘도록 복용했으나 아무 효과도 보지 못했다.
이 환자의 증세를 정리해 보면 얼굴이 붉고 열이 나며 땀이 나니 황련(黃蓮)과 황금(黃芩)을 쓰는 것이 옳다. 복통과 구토에 쓰는 처방이 많지만 황련과 황금이 든 처방을 골라야 한다. 반하사심탕을 쓸까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복통이 너무 심하다. 결국 입냄새, 혀의 상태, 복통, 구토는 황련탕증이 확실하다. 그리고 배꼽 주위의 복통과 니상변은 황금탕을 써야 하는 증세인 것이다. 그래서 황련탕과 황금탕을 합방하여 주었다.
이것을 복용하고 열이 내리고 복통과 구토 설사도 멈추었으며 땀도 그쳤다. 다시 6첩을 주었더니 이것으로 병이 완전히 나았다. 이 부인은 다음해 4월에 또 열이 나서 다시 황련탕과 황금탕을 합하여 10첩을 주었더니 다시 좋아졌다. 다음 해에도 5첩 이렇게 5년간 복용하고 완전히 건강해졌다. 암이 아니더라도 얼굴이 붉은 사람의 복통에 여러 차례 썼더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17) 결혼 직전 처녀의 유방암을 고친 이야기
24살 된 처녀가 유방암으로 찾아왔다. 2개월 뒤에 결혼하기로 날짜를 잡아놓은 처녀이다. 오른쪽 유방 젖꼭지 위쪽에 직경 1센티미터, 길이 3센티미터의 약간 단단한 종양이 생겼다. 열도 없고 아프지도 않다. 병원에서는 암이 너무 크다며 유방의 일부를 들어내야 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몸이 허약하고 오한이 나고 열이 나며 맥이 긴장되어 있긴 하지만 유방에는 아무런 통증이 없다. 그래서 갈근탕(葛根蕩) 5일분을 주었더니 3분지 2쯤 증상이 없어졌다. 몸이 허약하므로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을 주었다. 그러나 종양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귀기건중탕 10일분을 10일분을 주었다. 10일 뒤에 내가 만져보니 종양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환자는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멀리 울산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 곳에 가서 귀기건중탕 10일분을 보내달라고 했다. 벌써 5년이 지났지만 재발하지 않았다.
(18) 유방을 도려낸 유방암 환자
환자는 45살 된 부인이다. 유방암으로 왼쪽 유방을 완전히 도려냈다. 유방이 있던 자리가 까맣게 되어 있고 겨드랑이 쪽에는 아직 시퍼런 진물이 흐르고 있다. 유방을 들어냈는데도 그전과 꼭 같이 가슴을 조이듯이 아프다고 한다. 맥은 1분에 190으로 빠른 편이고 부활(浮滑)하다.
이것은 유방이 아픈 것이 아니고 가슴이 아픈 것이다. 곧 흉통이다. 흉통을 유방암으로 의사가 오진을 하여 잘라낸 것으로 보인다. 소함흉탕을 3일동안 복용하게 하였더니 흉통이 줄어들었고 다시 6일을 복용하게 하였더니 흉통이 사라졌다.
그러나 환자는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우긴다. 수술한 자리의 염증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날마다 병원에 다니며 통원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그 뒤로 소식이 없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다.
(19) 폐암을 치료하다 그만 둔 얘기
1987년 초여름, 부인이 부축하여 한 남자가 왔다. 나이는 40살이고 키는 180센티미터에 몸무게는 42킬로그램으로 마른 장작개비와 같다. 입이 말라 계속 물로 입을 축여야 하며 기침이 심하여 잠도 잘 수 없고 입이 쓰며 식욕도 없다. 손발이 차고 냉증이며 열은 없다. 복진을 해 보니 흉협고만이 있고 배꼽주변에 동계가 있다. 가장 큰 증상은 기침이다.
시호계지건강탕에 황기, 별갑(鱉甲)을 더하여 주었다. 3일 복용하여 기침이 줄어들고 10일을 복용하니 기침이 80퍼센트 줄어들었으며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때 어느 후세방을 하는 친구가 폐농양을 수십 명 고친 약이라고 하면서 암 박사의 추천서도 들어 있는 알약을 가지고 와서 환자한테 복용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기침이 몹시 심해져서 각혈을 하게 되고 환자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 후부터는 어떤 좋다는 약도 복진법으로 진단하여 얻은 처방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0) 피를 토하는 폐암을 완치
1990년 1월 16일, 서울 도봉동에 사는 35살 된 남자가 병원에서 폐암으로 고칠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천호동에 사는 친구의 소개로 찾아왔다. 환자는 1달에 한두 번씩 피를 토하며 피를 토한 뒤에는 가슴이 몹시 아프다고 한다.
얼굴이 희고 체격이 단단하며 폐암으로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매우 건강했다. 키는 162센티미터에 몸무게는 71킬로그램이며 술을 마시면 구토를 한다고 한다. 대변은 하루에 한 번 되게 본다. 배에 늘 포만감이 있고 뜨거운 방에서는 잠을 자지 못한다. 뱃가죽이 두껍고 양쪽 옆구리가 단단하며 흉협고만이 강하게 나타난다. 갈비뼈 밑을 손으로 눌러도 손이 들어가지 않는다. 또 배꼽 주위가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맥은 무겁고 힘이 있다.
흉협고만이 강하고 비만증이 있으며 맥에 힘이 있는 데에는 대시호탕이요, 배꼽주위가 딱딱하고 비만한데는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이 옳다. 결국 대시호탕에 방풍통성산을 합하여 계속 복용하게 했다.
거의 한 달 뒤인 2월 19일, 피를 토하는 증상은 없어지지 않았으나 흉통은 없어졌다. 그리고 3월 4월 5월까지 한 번도 피를 토하지 않았다. 약을 복용한지 4개월 째에 대변이 많이 나오고 배의 포만감도 없어졌다. 이 환자는 여름에도 배를 덮고 자지 않으면 설사가 났는데 그 뒤로는 배를 덮지 않아도 설사가 나지 않았다. 환자는 배가 따뜻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차가운 성질의 약이 배를 따뜻하게 해 준 것이다. 또 배가 푹 꺼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고 한다. 칼을 쓰지 않고 이렇게 암이 깨끗하게 낫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21) 재발한 췌장암을 약 열 첩으로 치유
1985년 4월, 환자는 어느 약국 종업원의 외삼촌. 58살 된 남자로 어느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복통이 몹시 심하다고 하며 전에 췌장암으로 수술을 했는데 그 자리가 또 아프다는 것이다. 환자는 그 자리를 다시 수술하는 것이 몹시 겁이 나서 수술을 거부하고 나한테 왔다.
환자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약간 야윈 편이다. 배가 몹시 아프고 구토가 심하게 난다. 복진을 해 보니 흉협고만이 심하게 나타나고 환부에 약간 손을 대기만 해도 몹시 아프다고 한다. 소시호탕에 복통을 그치게 하는 데는 작약이 좋으므로 백작약 12그램을 넣어서 4첩을 주었다. 과연 환자는 복통과 구토가 사라졌다. 다시 6첩을 주었더니 그것을 복용하고 쾌유되어 시골로 갔다.
그리고 얼마 뒤에 환자의 아들과 며느리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어떠냐는 질문에 괜찮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럴 리가 없으니 모시고 오라고 했다. 환자는 아직 속이 울렁거리기는 하지만 배는 아프지 않아서 아들과 며느리가 돈을 쓰는 것이 안쓰러워서 괜찮다고 했다고 한다. 약을 20첩 주었다. 그리고 3년 뒤에 그 약방 종업원을 만났다. 외삼촌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아무런 탈이 없다고 했다.
(22) 다 고친 췌장암 환자 항암제로 사망
1990년 2월, 환자는 성남시에서 떡방아간을 경영하는 사람이다. 지난 해 여름부터 가끔 배가 아팠다. 음력 설 무렵에 부부가 쌀 10가마니를 떡을 만드느라 계속 밤을 세워 일을 했다. 너무 무리해서 그런지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니 췌장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병원에서 권하는 데로 수술을 했는데 배를 열어 보니 암이 전체에 퍼져서 그대로 도로 덮어두고 환자한테는 수술했다고 속였다고 한다.
환자는 40살 된 남자로 키는 150센티미터에 몸무게는 45킬로그램인데 병원에 갔다오고 나서 7킬로그램이 빠져 38킬로그램이 되었다. 내가 제자들과 같이 갔을 때 복통이 심해 말을 못하고 맥은 1분에 200번이 넘게 뛰었다. 뱃가죽이 심하게 오그라들어 마치 꼽추처럼 되어 누울 수도 없고 옆으로 새우처럼 꼬부리고 있었다. 배를 만져 보니 배 전체에 나무 판자를 깐 것처럼 딱딱하고 췌장부위에도 플라스틱 관을 꽂아 췌장 즙이 나오도록 해 놓은 것으로 보였다.
환자는 복통이 극심하여 물어도 대답을 할 수 없고 다만 배를 잡고 뒹굴 뿐이다. 암이 너무 심하므로 치료는 불가능하지만 고통이나 덜어보자고 북진에 나타난 대로 소건중탕을 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환자가 너무 쇠약하니 황기, 인삼을 각각 6그램을 더하여 6첩을 보냈다. 그런데 놀라운 효과가 나타났다. 그 맹렬하던 복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환자는 음식도 잘 먹고 외출도 마음대로 했다. 부인은 환자가 다 나은 것으로 믿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게 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보고 암이 더 넓게 퍼졌다면서 배에 꽂아놓은 플라스틱 관을 통해 아마 항암제인 듯한 가루약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집에 오자 환자는 아파 죽는다면서 미친 사람처럼 날뛰고 부인을 두들겨 패고 부모한테도 막 대어들고 펄펄 뛰며 닥치는 대로 마구 집어던지며 소동을 피웠다. 아마 뱃속에 무슨 극약을 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암환자가 통증이 없어지면 상대적으로 엑스레이 사진에는 더 나빠진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일이 오스까 씨한테 두 번 있었고 나한테도 두 번 있었다. 오스까 씨한테 있었던 한 예는 환자의 상태는 점점 더 좋아지는데 사진에서는 더 나빠졌다. 그런데 그 환자는 3년이 지나도 재발하지 않았다.